• 이미지 SUV
  • 이미지 엠피비
  • 이미지 의자 가마
  • 이미지 EV
엘즈_프로_01

소식

동풍회사의 발전 역사를 알고 계신가요?

"중국은 너무 커서 FAW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제2 자동차 공장을 건설해야 합니다." 1952년 말, 제1 자동차 공장 건설 계획이 모두 확정된 후, 마오쩌둥 주석은 제2 자동차 공장 건설을 지시했습니다. 이듬해 제1기계공업부는 제2자동차회사 건설 준비 작업에 착수하여 우한에 제2자동차공장 준비사무소를 설립했습니다.

동풍 자동차

소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우창 지역에 공장 부지를 선정하여 국가건설위원회와 제1기계공업부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제1기계공업부에 보고된 후, 많은 논란이 일었습니다. 국가건설위원회, ​​제1기계공업부, 자동차국은 모두 경제 건설 측면에서 우한에 제2자동차공업부를 건설하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우한은 해안선에서 약 80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공장들이 밀집된 평야 지대에 위치하여 전쟁 발발 후 적의 공격을 받기 쉽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외 여건을 충분히 검토한 제1기계공업부는 우창에 공장을 건설하는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전차

첫 번째 제안은 거부되었지만, 두 번째 자동차 공장 건설 계획은 차질을 빚지 않았습니다. 1955년 7월, 몇 차례의 논의 끝에 고위 경영진은 제2자동차 공장 부지를 우창에서 쓰촨성 청두 동부 교외의 바오허창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번에는 고위 경영진이 제2자동차 공장 건설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며, 청두 교외에 약 2만 제곱미터 규모의 기숙사를 조기에 건설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이 계획은 예정대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제2자동차 부지 규모를 둘러싼 국내 갈등과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중 중국 내 과도한 사회기반시설 건설로 인해 제2자동차 공장 건설 계획은 1957년 초 "반공세"의 영향으로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이때 이미 쓰촨으로 몰려들었던 1,000여 명의 자동차 인재들도 제1자동차부, 제1자동차공장 등 기업체로 전근되었습니다.

제2차 자동차 프로젝트가 일시적으로 수주된 직후, 중국은 다시 한번 제2차 자동차 생산을 지원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당시 북한에 입대했던 중국 지원병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정부는 병력 재정착이라는 난제에 직면했습니다. 마오쩌둥 주석은 귀국 지원병들 중 한 부대를 강남으로 이동시켜 제2차 자동차 공장 건설을 준비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제2 자동차 공장 건설에 대한 열기가 다시 불붙었습니다. 당시 부총리였던 리푸춘은 "장강 유역의 후난에는 큰 공장이 없으니, 제2 자동차 공장을 후난에 짓겠다!"라고 지적했습니다. 1958년 말, 부총리의 지시를 받은 제1기계국 자동차국은 후난에서 부지 선정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했습니다.

전차

1960년 2월, 예비 부지 선정을 마친 자동차국은 제2자동차공장 건설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담은 보고서를 제1자동차공장에 제출했습니다. 같은 해 4월, 제1자동차공장은 이 계획을 승인하고 800명의 정비사 양성반을 설치했습니다. 제2자동차공장이 모든 관계자의 지지 속에 순조롭게 착공될 것으로 예상되자, 1959년부터 이어진 "3년간의 고난"은 제2자동차사업의 시작을 다시 한번 중단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국가 경제가 극도로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제2자동차사업의 초기 자본 조달이 지연되었고, 불운했던 이 자동차공장 사업은 다시 해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이나 하차해야 했던 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과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중앙 정부는 제2 자동차 공장 건설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64년, 마오쩌둥은 제3선 건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제안하며 제2 자동차 공장 건설을 세 번째로 제안했습니다. 제1 엔진 공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제2 자동차 공장 부지 선정이 다시 진행되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조사 끝에 여러 준비팀은 후난성 서부의 천시(陈溪), 루시(陈溪), 송시(松溪) 인근 부지를 선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부지는 세 개의 하천을 관통하여 "산시 계획(三溪計程)"이라고 불렸습니다. 이후 준비팀은 산시 계획을 지도부에 보고했고,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제2 증기 터빈 부지 선정은 큰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포딩 전기 자동차

부지 선정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중앙 정부는 최고 지시를 내려 "산에 의지하고, 분산하고, 숨어라"는 육자 정책을 내세우며 부지는 산에 최대한 가까이 두고, 핵심 장비는 굴에 진입하도록 했습니다. 사실 이 지시를 통해 당시 우리 정부가 제2자동차회사 부지 선정에서 전쟁 요인에 집중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건국된 지 10년이 넘은 신중국의 세계 정세가 평화롭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 후, 당시 장춘 자동차 공장의 이사 겸 수석 엔지니어였던 자동차 전문가 천조타오가 부지 선정에 나섰습니다. 오랜 조사와 측량 작업 끝에, 준비팀 수십 명은 1964년 10월 부지 선정 계획을 거의 확정하고 일괄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부지 선정 계획이 상부에 제출된 직후, 제2자동차회사의 부지 선정 과정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대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1964년 10월부터 1966년 1월까지 15개월간의 부지 선정 기간 동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제2자동차공장 부지 선정에 참여하여 57개 시군을 현장에서 조사하고, 차량으로 약 42,000km를 주행하며 12,000건 이상의 데이터를 기록했습니다. 준비단의 많은 구성원들은 10개월간의 시찰 기간 동안 한 번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집에 가기도 했습니다. 여러 지역의 실제 상황에 대한 체계적이고 완전한 평가를 통해 마침내 십얀-장쥔 강 지역이 공장 건설에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부지 선정 계획은 1966년 초에 제출되었습니다. 근면하고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중국의 구세대 오토봇의 정신은 현재 국내 자동차 제조업체에서 배울 가치가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제2자동차회사의 부지 선정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후 중앙 정부는 제2자동차공장 부지 선정을 보완하고 최적화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기술자들을 파견했습니다. 제2자동차회사의 스옌 공장 건설 계획은 1966년 10월이 되어서야 거의 확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제2자동차회사가 다시 위기에 처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발발했습니다. 당시 많은 홍위병들이 조직되어 국무원 부총리 리푸춘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스옌에 제2자동차회사를 설립하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제2자동차공장 건설 계획은 다시 연기되었습니다.

1967년 4월과 1968년 7월, 제1엔진공장 주요 간부들은 제2증기터빈 부지 선정을 위해 두 차례 부지 조정 회의를 가졌습니다. 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스옌에 제2증기터빈을 건설하기로 한 결정은 옳았지만, 세부적인 조정만 필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따라서 제1엔진공장은 "기본 고정, 적정 조정" 원칙을 수립하고 제2증기터빈 부지에 대한 부분적인 조정을 진행했습니다. 16년간의 "2차, 3차" 조정 끝에

1965년 스옌에 공장을 설립한 이래, 제2자동차는 간이 공장에서 모델 개발 및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1965년 초, 제1기계부는 장춘에서 자동차 산업 기술 정책 기획 회의를 개최하고, 장춘 자동차 연구소를 제2자동차의 지도 아래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동시에, 완궈(Wanguo)와 닷지(Dodge) 브랜드의 모델을 수입하여 참고하였고, 당시 생산된 지에팡(Jiefang) 트럭을 참고하여 제2자동차 최초의 군용 오프로드 차량을 개발했습니다.

동풍 포딩

1967년 4월 1일, 아직 정식 착공하지 않았던 제2자동차회사는 후베이성 ​​스옌시 루거우즈에서 상징적인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당시 문화대혁명이 이미 시작되어 운양군구 사령관은 사고 예방을 위해 병력을 이끌고 준비사무소에 주둔했습니다. 제2자동차회사는 기공식 2년 후, 비로소 실제 착공에 들어갔습니다.

중앙 정부의 "군대를 우선하고, 인민보다 군대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지시에 따라, 제2자동차회사는 1967년 2톤 군용 오프로드 차량과 3.5톤 트럭을 생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델이 확정된 후, 제2자동차회사는 제대로 된 생산 R&D팀을 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재 부족이 극심해지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다른 국내 자동차 제조업체에 핵심 인재를 배치하여 제2자동차회사의 핵심 생산 문제 해결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969년, 우여곡절 끝에 제2자동차공장은 대규모 건설을 시작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10만 명의 건설 인력이 스옌에 잇따라 집결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1969년 말까지 지더위, 멍샤오농을 비롯한 국내 최고 자동차 기술진을 포함하여 제2자동차공장 건설에 자원하여 참여하고 지원한 간부, 엔지니어, 기술 인력은 1,273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중국 자동차 산업의 거의 최고 수준을 대표했으며, 이들의 팀은 제2자동차회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제2자동차회사가 공식적으로 대규모 생산 및 제작을 시작한 것은 1969년이 되어서였습니다. 최초의 연구 개발 모델은 코드명 20Y로 명명된 2.0톤 군용 오프로드 차량이었습니다. 당초 이 차량의 생산 목적은 포병을 견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제차가 생산된 후, 제2자동차회사는 이 모델을 기반으로 여러 파생 모델을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전투 준비 태세 강화와 견인 중량 증가로 인해 군은 차량의 중량을 2.5톤으로 늘려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20Y라는 이름의 이 모델은 양산되지 않았고, 제2자동차회사는 25Y라는 이름의 새로운 차량을 개발하는 데 착수했습니다.

전차

차량 모델이 확정되고 생산팀이 완성된 후, 제2자동차는 다시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당시 중국의 산업 기반은 매우 취약했고, 산간 지역에 위치한 제2자동차의 생산 자재는 극히 부족했습니다. 대규모 생산 설비는 고사하고, 공장 건물조차도 임시 갈대 창고였습니다. 리놀륨을 천장으로, 갈대 창고를 칸막이와 문으로 사용하여 "공장 건물"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갈대 창고는 더위와 추위를 견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바람도 막아줄 수 있었습니다.

포팅 자동차

더욱이 당시 제2자동차회사 직원들이 사용하던 장비는 망치와 망치 같은 기본 공구에 국한되었습니다. 제2자동차회사는 제1자동차공장의 기술 지원과 지팡트럭의 기술 사양을 참고하여 몇 달 만에 2.5톤급 25Y 군용 오프로드 차량을 제작했습니다. 당시 차량의 형태는 이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졌습니다.

동풍 포딩

그 이후로, 제2자동차회사에서 생산한 2.5톤 군용 오프로드 차량은 공식적으로 EQ240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1970년 10월 1일, 제2자동차회사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21주년 기념 퍼레이드에 참여하기 위해 EQ240 모델의 첫 번째 배치를 우한으로 보냈습니다.이때 이 차를 생산한 제2자동차회사의 사람들은 이 패치워크 모델의 안정성에 대해 걱정했습니다.공장은 심지어 다양한 업종의 200명 이상의 근로자를 퍼레이드 장소의 연단 뒤에 쪼그리고 앉아 수리 도구를 가지고 몇 시간 동안 일하게 하여 문제가 있는 EQ240을 언제든지 수리했습니다.EQ240이 연단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후에야 제2자동차회사의 매달린 심장이 내려졌습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은 오늘날에는 그다지 빛나 보이지 않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초창기 제2자동차공장의 노고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1971년 6월 10일, 제2자동차회사의 첫 번째 자동차 조립 라인이 완공되었고, 완성된 조립 라인을 갖춘 제2자동차회사는 봄을 맞이하는 듯했습니다. 7월 1일, 조립 라인의 디버깅과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2자동차회사는 루시펑의 수공예 자동차 역사를 마감했습니다.

이후, 사람들의 인식 속에 EQ240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천즈타오(陈祖濤)가 이끄는 기술팀은 조립 라인이 완성된 후 EQ240의 개조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핵심 문제 해결, 시운전, 엔지니어링 품질 수리를 위한 회의를 통해 여러 차례 개선 작업을 진행한 끝에, 제2자동차회사는 1년여 만에 EQ240의 핵심 품질 문제 104개를 해결했으며, 900개 이상의 부품이 수정되었습니다.

동풍 SUV

1967년부터 1975년까지 8년간의 연구 개발, 생산, 그리고 개량 끝에 제2자동차공장 최초의 군용 오프로드 차량인 EQ240이 마침내 완성되어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EQ240이라는 이름의 군용 오프로드 차량은 당시 해방 트럭을 의미하며, 수직형 전면 그릴은 당시 상징적인 트럭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어 매우 강인한 인상을 줍니다.

동시에 제2자동차회사는 국무원에 자사 제품의 브랜드명을 "동풍(东風)"으로 정하겠다고 선언했고, 국무원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제2자동차와 동풍은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 중국과 미국은 점차 수교 관계를 정상화했지만, 막강한 형이었던 구소련은 중국의 국경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구소련의 지원을 받아 중국-베트남 국경을 자주 도발하여 국경 주민과 국경 수비대를 끊임없이 살상하고 중국 영토를 침범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1978년 말 베트남에 대한 자위적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이때 막 창설된 EQ240은 중국과 함께 최전선에서 가장 혹독한 시험을 치렀습니다.

동풍 포딩

루시펑에서 생산된 최초의 EQ240부터 베트남 반격 작전의 성공적인 완료까지, 제2 자동차 공장 또한 생산 능력의 비약을 이루었습니다. 1978년, 제2자동차회사의 조립 라인은 연간 5,000대의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산 능력은 증가했지만, 제2자동차회사의 이익은 감소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의 주된 원인은 제2자동차회사가 군용 오프로드 차량과 트럭을 꾸준히 생산해 왔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자, 대량 생산에 고비용을 투자했던 이 회사들은 더 이상 사용할 곳이 없어졌고, 제2자동차회사는 적자의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사실, 베트남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기 전부터 제2자동차를 포함한 국내 자동차 업계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했습니다. 따라서 제2자동차는 1977년 초부터 자사의 5톤 트럭 CA10 기술을 제2자동차에 무상 이전하여 제2자동차가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피하면서 민수용 트럭을 개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둥펑 모터

당시 FAW는 CA140이라는 이름의 트럭을 제작했는데, 원래는 CA10을 대체할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FAW는 이 트럭을 No.2 Automobile Company에 연구 및 생산을 위해 기꺼이 양도했습니다. 이론적으로 CA140은 EQ140의 전신입니다.

기술뿐만 아니라 FAW에서 개발한 CA10 모델의 핵심 기술까지, Second Automobile Company가 이 민수용 트럭을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기술진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 개발 과정이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당시 전 세계 수많은 5톤 트럭 샘플을 분석 및 비교 분석했습니다. 5차례의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R&D 팀은 크고 작은 100여 개에 달하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EQ140이라는 이름의 이 민수용 트럭은 최고 경영진의 적극적인 추진 아래 신속하게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포팅카

이 EQ140 민수용 트럭이 제2자동차회사에 미친 의미는 그 이상입니다. 1978년, 국가가 제2자동차회사에 할당한 생산 과제는 민수용 차량 2,000대를 생산하는 것이었고, 자전거 가격은 2만 7,000위안이었습니다. 군용 차량에 대한 목표는 없었고, 국가는 이전 목표였던 5,000만 위안에 비해 3,200만 위안의 손실을 예상했습니다. 당시 제2자동차회사는 여전히 후베이성에서 가장 큰 적자 기업이었습니다. 손실을 이익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비용 절감이 핵심이었으며, 민수용 차량 5,000대를 생산해야 했고, 그 결과 비용이 2만 7,000위안에서 2만 3,000위안으로 줄었습니다. 당시 제2자동차회사는 "품질 보장, 과잉 생산 노력, 손실 왜곡"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제품 품질 향상을 위한 투쟁”, “5톤 트럭 생산능력 건설을 위한 투쟁”, “적자 발생을 위한 투쟁”, “5톤 트럭 연간 생산량 5,000대를 위한 투쟁” 등이 제안됐다.

후베이성의 지원을 받아 1978년, 제2자동차회사는 이 차로 손실을 흑자로 전환하기 위한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습니다. 1978년 4월 한 달 동안만 420대의 EQ140 모델을 생산하여 연간 5,120대를 생산했고, 연간 3,120대의 과잉 생산을 기록했습니다. 계획된 손실을 현실화하기는커녕, 131만 위안을 국가에 환원하여 전면적인 흑자 전환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당시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1980년 7월, 덩샤오핑은 제2자동차회사를 시찰하며 "군용 차량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좋지만, 장기적으로는 근본적으로 민용 제품을 개발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제2자동차회사의 기존 발전 방향을 확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군용에서 민용으로 전환"이라는 기본 방침을 명확히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후 제2자동차회사는 민용 차량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여 민용 차량 생산 능력을 전체 생산 능력의 90%까지 확대했습니다.

동풍 자동차

같은 해, 국민 경제는 조정기에 접어들었고, 제2자동차회사는 국무원으로부터 "중단 또는 지연" 프로젝트로 지정되었습니다. 암울한 상황에 직면한 제2자동차회사의 의사결정권자들은 "자력으로 생활하고, 자력으로 자금을 조달하며, 제2자동차회사를 계속 건설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국가에 제출했고, 이 보고서는 승인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2자동차회사 사장을 지낸 황정샤는 회고록에서 "국가의 '이탈'과 기업의 과감한 발전은 계획 경제 체제 하의 단계적 건설보다 10배, 100배 더 강력하며, 이는 생산력을 진정으로 해방시키고 제2자동차회사의 급속한 발전을 촉진하여 국가 경제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썼습니다.

제2자동차는 EQ240과 EQ140 모델을 기반으로 혁신을 지속했지만, 당시 중국 국내 자동차 산업의 제품 구조는 심각하게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무게 부족, 경량화, 거의 백지 상태"는 당시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들의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제2자동차는 1981년부터 1985년까지의 제품 개발 계획에서 중국 내 "무게 부족"이라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플랫헤드 디젤 트럭 개발 계획을 다시 한번 제시했습니다.

제품 개선 기간을 단축하고 당시 국내 개혁 개방 환경에 부응하기 위해 제2자동차회사는 해외 선진 기술 경험을 활용하여 이 플랫헤드 대형 트럭의 연구 개발을 완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수년간의 연구와 개선 끝에 1990년, 완전히 새로운 8톤 플랫헤드 디젤 자동차가 조립 라인에서 천천히 생산되었습니다. 이 차의 이름은 EQ153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름다운 외관과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이 EQ153을 극찬했으며, "팔평장(八平藏)을 몰고 돈 굴리기"는 당시 대다수 자동차 소유주의 진정한 열망을 보여주는 표현이었습니다.

동풍 SUV 자동차

또한, 이 기간 동안 제2자동차(주)의 생산 능력 또한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1985년 5월, 동풍자동차(주)는 30만 대의 차량을 조립 라인에서 출고했습니다. 당시 제2자동차(주)에서 생산한 차량은 전국 자동차 보유량의 8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불과 2년 후, 제2자동차(주)는 50만 대의 차량을 조립 라인에서 출고하고 연간 생산량 10만 대를 달성하여 세계 중형 트럭 생산량 1위 기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제2자동차회사가 공식적으로 "동풍자동차회사"로 개칭되기 전, 당시 경영진은 트럭 제조는 "초등학교 수준", 자동차 제조는 "대학 수준"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강하고 크게 성장하려면 소형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상하이 폭스바겐은 이미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고, 제2자동차회사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일련의 합작 자동차 개발 계획을 제시했습니다.

전차

1986년, 당시 제2자동차회사는 국무원에 "제2자동차공장 일반 승용차 개발 예비 작업 보고서"를 공식 제출했습니다. 관련 기관들의 강력한 지지 속에 국가경제위원회, 계획위원회, 기계위원회 등 각 부처의 수장들이 1987년 북대하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에서는 제2자동차회사의 승용차 개발에 대한 논의가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회의 직후, 중앙 정부는 제2자동차회사가 제시한 "합작 개발, 합자 공장 설립, 수출 주도, 수입 대체"라는 전략 정책을 공식 승인했습니다.

합작 투자 계획이 중앙 정부의 승인을 받은 후, 제2자동차회사는 즉시 광범위한 국제 교류를 전개하고 파트너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당시 제2자동차회사는 14개 외국 자동차 회사와 78건의 협력 협상을 체결하고, 11건의 방문단을 파견했으며, 48건의 방문단을 공장 방문 및 교류했습니다. 최종적으로 프랑스 시트로엥자동차회사가 협력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둥펑 모터

21세기에 동풍은 합작 레이아웃 구축의 정점을 맞이했습니다. 2002년 동풍 자동차는 프랑스 PSA 그룹과 합작 계약을 체결하여 협력을 확대했으며, 이 합작의 주요 내용은 전면적으로 푸조 브랜드를 중국에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합작 후 회사 이름은 동풍 푸조입니다. 2003년 동풍 자동차는 다시 합작 재편을 겪었습니다. 동풍 자동차는 마침내 닛산 자동차와 50% 투자 형식으로 동풍 자동차 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후 동풍 자동차는 혼다 자동차와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협의 후 양측이 각각 50%씩 투자하여 동풍 혼다 자동차를 설립했습니다. 단 2년 만에 동풍 자동차는 프랑스와 일본의 3개 자동차 회사와 합작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지금까지 동풍자동차는 중형 트럭, 대형 트럭, 그리고 승용차를 기반으로 다양한 제품을 개발해 왔습니다. 동풍 브랜드의 50년 발전 역사 속에서 동풍인들에게는 기회와 도전이 항상 함께했습니다. 초창기 공장 건설의 어려움부터 오늘날의 자립적 혁신의 어려움까지, 동풍인들은 변화에 대한 용기와 끈기로 험난한 길을 헤쳐왔습니다.

웹사이트: https://www.forthingmotor.com/
Email:dflqali@dflzm.com lixuan@dflzm.com admin@dflzm-forthing.com
전화: +867723281270 +8618577631613
주소: 중국 광시성 류저우 핑산 애비뉴 286호


게시 시간: 2021년 3월 30일